일제 강점기 천부적인 싸움 감각과 날쌘 몸놀림으로 만주 일대와 한반도 야인들을 무릎 꿇린 사내가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들을 괴롭히던 일본인들을 혼내주었고, 독립 이후 이북 상인들을 지켜주며 홀로 강자들과 맞붙던 이 사내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주먹이라 불리고 있는데요. 6.25전쟁 당시 킬로 부대원들의 대장을 맡으며 전쟁에 나섰던 시라소니(이성순)에 대한 수많은 일화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 최고의 낭만 주먹 시라소니의 비밀 9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시라소니 이성순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1916년 2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집안이 기울자 17세부터 기차에서 밀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는데요. 날쌘 몸놀림과 천부적인 싸움 감각을 가졌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주먹으로 북한과 만주 일대를 평정하게 '주먹 황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 대륙과 한반도 전역을 주름 잡으면서도 전과 기록조차 없었던 그는 이른바 '협객'으로 불리고 있죠.
2. 시라소니는 약이 올라 이북 최고의 주먹이 되었다
신의주를 주먹으로 평정한 시라소니는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북 최고의 주먹이 박두성이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약이 오른 시라소니는 박두성을 쓰러트려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박두성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되는데요. 씨름선수 출신이자 거구였던 박두성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시라소니가 다짜고짜 한판 붙자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박두성에게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죠. 하지만 시라소니를 얕잡아 본 박두성은 너무도 방심한 탓에 일생일대의 큰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3. '시라소니'라는 별명은 원래'평양 박치기'였다
중국 톈진에서 장사를 하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당시 한 식당에서 일본군 장교와 시비가 붙게 됩니다. 이때 일본군 장교가 칼을 뽑아 이성순의 목을 치려하는 순간 이성순이 이마를 들이대게 되는데요. '평양 박치기'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칼보다 박치기가 빠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마를 들이댄 것이었죠. 그 모습을 본 일본군 장교는 이성순의 배짱에 한발 물러나게 되었고 "당신이 진정한 시라소니다"라고 말하면서 이후 사람들은 그를 시라소니라 부르게 됩니다.
4. 시라소니는 당시 키로 장신에 속했다
일반적으로 시라소니는 단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날렵한 몸짓으로 상대를 제압했다는 일화는 단신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하지만 그건 건달 세계에 큰 덩치들과 상대적인 비교에 의한 말일뿐 실제로 시라소니의 아들이 언급한 부친의 키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당시 178cm의 신장을 가졌던 시라소니는 일반 남성의 평균 신장보다도 훨씬 큰 키와 덩치를 가졌다고 하죠.
5. 시라소니는 새끼손가락이 없다
시라소니 손가락 사건은 이미 유명한 일화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하나는 월남 전 여자와 잠을 자던 도중 들이닥친 정부가 휘두른 칼에 새끼손가락이 스치며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인데요. 병원에서는 회복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 말하자 성질급한 시라소니는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잡아 찢었다는 일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국 깡패 30여 명과 술집에서 싸우다 들이닥친 헌병대에게 새끼손가락을 잘라 보이며, "내일 출두하겠다"라고 말한 일화인데요. 약속한 다음날 헌병대에 찾아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비명 한번 안 지른 시라소니를 본 현병 대장은 그를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건 외출 시 시라소니는 항상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것이죠.
6. 시라소니는 이정재를 납치한 적이 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당시 특수부대인 켈로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시라소니는 전쟁 이후 중요도가 사라지자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먹여 살릴 길이 막막했습니다. 일자리 없이 굶고 있는 동료들을 본 시라소니는 어려운 상황을 도움받기 위해 의형제였던 이정재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요. 동대문 점포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거나 돈을 요구하기도 했죠. 이정재는 아무리 자신을 구해진 은인이었지만 동대문 최고 위치에 있던 이정재에게 이런 식의 부탁은 기분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마찰이 생기자 결국 시라소니의 부하들은 이정재를 납치하는 사건을 벌이게 되는데요. 당시 시라소니는 비겁한 짓을 하기 싫다며 납치해 온 이정재를 돌려보내게 됩니다.
7. 시라소니는 목사 시절 "주먹으로 흥한 자 주먹으로 망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의형제였던 이정재와 그의 조직원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했던 시라소니는 결국 주먹세계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시라소니는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자신이 얻은 명성이 비해 고통이 너무도 컸습니다. 한때 복수를 결심했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정재 또한 현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죠. 시라소니는 결국 1960년 목사 안수를 받고 주먹계 후배들을 대상으로 교화 강연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시라소니가 늘 말했던 것이 바로 "주먹으로 흥한 자 주먹으로 망한다"라는 명언이었죠.
8. 그는 친구 때문에 1대 40으로 싸운 적이 있다
시라소니 싸움 중 가장 잘 알려진 카네미야 패거리와의 대결은 1대 40으로 싸운 일화로 유명합니다. 시라소니가 이들과 싸운 이유는 한국계 일본 깡패였던 카네 미야 패거리 40명이 한 남성을 집단 린치 하면서 시작되는데요. 집단 린치를 당한 사람이 바로 시라소니의 친구였던 것이죠. 화가 난 시라소니는 당시 쇠 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일본 깡패 40명을 홀로 상대해 승리를 거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싸움은 자칫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을 정도로 힘겨운 싸움이었다고 전해졌죠.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당시 불리한 상황을 대비한 시라소니는 사전에 칼을 준비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9. 시라소니는 부러진 손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1953년 8월 시라소니에 앙심을 품은 동대문 사단 40여 명은 손도끼, 쇠 파이프, 아령, 돌, 갈고리 등을 갖고 시라소니를 유인해 기습하게 됩니다. 당시 집단 린치를 당한 시라소니는 두개골이 함몰되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게 되죠. 하지만 평소 시라소니에게 원한이 있었던 동대문 사단 조직원 '이석재'는 시라소니의 나머지 왼쪽 다리마저 부러뜨리기 위해 병원으로 찾아오게 되는데요. 상황을 재빨리 눈치챈 시라소니는 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오른손 주먹으로 이석재의 코를 강타했고 코피가 터져 소란이 일어나면서 의사와 간호사 경찰이 달려오는 바람에 급히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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